소떼른과 바르삭은 보르도 시에서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특이하고 유명한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와인 생산자들은 오랫동안 어려움에 직면해 왔다.
와인은 지극히 이국적이며, 뇌쇄적일 정도로 달콤하고 퇴폐적이다 싶을 정도로 요염한 맛을 지니고 있지만 생산 자체가 너물 힘들기 때문이다. 와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포도가 익으려면 기후가 받쳐줘야 하고, 다행히 날씨가 알맞은 해에도 다른 와인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는 인건비 문제를 감수해야만 소떼른에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소떼른의 스위트 와인들은 좋은 빈티지를 보기가 힘들다. 10년에 서너 해 정도 밖에는 좋은 와인이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포도원들이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같이 재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독특한 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맛을 고수하며 꿋꿋하게 와인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런 고집스러움이 소떼른 와인의 전통을 지켜주고 있다.
다행히 보르도 전역에서 ‘황금의 3년’ 이라고 불렸던 1988, 89, 90년은 소떼른에서도 행운이었다. 최적의 기후가 3년 내내 펼쳐진 1980년대 말 소떼른 와인도 르네상스를 이루기 시작했다. 자연이 그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떼른 지역에 혜택을 선사한 것일까. 그 후로 소떼른 와인은 위대하다는 인식이 더욱 확대되었고, 소비자들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소떼른과 바르삭의 와인 메이커들이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아주 어려운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다른 지역의 샤또에서는 수확이 끝날 무렵, 소떼른에는 희망과 공포가 동시에 몰려온다. 안개가 끼느냐 마느냐에 따라 와인을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9월 하순부터 소떼른에는 아주 특이한 기후가 펼쳐진다. 안개가 많고 습도가 높지만 그와 반대로 온후하고 건조한 날씨가 교차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의 신비다. 그 중에서도 강이 와인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소떼른 가까이에 가론과 씨롱(Ciron)강이 있다.
차가운 물이 흐르는 넓은 가론 강을 향해 그보다 따뜻한 씨롱 강물이 흘러들어간다. 수온 차이로 인해 저녁부터 발생한 안개는 다음날 늦은 아침까지 포도밭을 자욱하게 뒤덮는다. 오후가 되면서 쨍쨍한 가을 햇살은 안개를 날려버리고 눅눅하던 아침은 건조한 오후로 바뀐다. 포도는 극단적인 날씨 변화로 인해 축축했다 건조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노블 랏(Noble Rot: 숭고한 썩음)
안개 때문에 활성화된 보트리티스 씨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미세한 곰팡이는 이처럼 극단적인 날씨 변화로 인해 성장이 촉진된다. 보트리티스 균은 포도 알맹이를 공격하며 귀부병에 걸리게 만든다.
귀부병에 걸린 포도 알맹이들은 상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노블 랏’(Noble Rot: 말 그대로 포도가 곰팡이로 인해 썩는데도 고급스러운 맛을 내기 때문에 ‘숭고한 썩음’이라 부르는 것이다)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다 익은 포도가 썩으면서 포도 껍질은 쭈글쭈글해지고, 수분이 빠져나간다. 세미용의 성격은 완전히 변한다. 초록빛은 갈색으로 변하고, 사이즈는 4분의 1정도로 줄어든다. 대신 당도가 높아지면서 고도로 맛이 집중되고, 아로마가 화려하고, 달콤한 넥타가 만들어진다. 이런 모든 상황 변화는 산도를 잃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다.
보트리티스가 적게 생성되면 복잡성이나 입체감이 떨어지는 빈약한 와인이 나온다. 스위트 와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과육이 충분히 익는다 해도 당분이 알콜로 충분히 전환되기 전에 발효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노블 랏은 굉장히 느리고 불규칙적으로 진행된다. 날씨가 적당해서 노블 랏이 이뤄진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제대로 썩은 포도만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10월과 11월 사이 여러 번에 걸쳐 포도를 따러 나간다. 이런 과정을 ‘계속적인 선별’이라고 부른다.
좋은 샤또들은 여섯 번 이상 수확하러 나가고, 샤또 디켐(d'Yquem)은 열 번 이상 내보낸다. 수확 작업은 알맹이를 하나하나 따기 때문에 힘이 들고, 돈도 많이 든다. 와인 생산량은 적을 수밖에 없고, 이켐(Yquem: 샤또 디켐이라고 부르지만, 샤또를 빼고 부를 때는 이켐이라고 한다.) 같은 경우는 포도나무 한 그루당 한 잔의 와인이 만들어질 뿐이라고 한다.
수확기간에도 날씨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폭풍우나 서리는 그 해의 수확을 완전히 재앙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소떼른에서는 최소 알콜 농도를 유지해야 한다. 와인의 알콜 도수는 반드시 13도를 넘어야만 한다. 또한 달지 않으면 소떼른 와인이라 할 수 없으므로 당도에 대한 심사도 거쳐야 한다. 다른 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엄격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재배되는 품종
소떼른에 재배되는 품종은 세 가지다. 세미용과 소비뇽 블랑, 그리고 뮈스까델이다.
노블 랏이 가장 잘 발생되는 세미용이 소떼른의 주품종이다. 전체 포도의 80퍼센트 이상이 세미용이다. 소비뇽 블랑도 브트리티스 균에 의해 썩지만, 특유의 아로마가 사라져버리는 단점이 있다. 대신 소비뇽 블랑은 신선함과 균형미를 갖추는 역할을 맡는다. 소량의 뮈스까델은 아로마를 형성시키는 걸 도와준다. 달콤하면서도 끈끈하고, 일견 벌꿀 같기도 한 소떼른 와인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블렌딩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토머스 제퍼슨은 소떼른 와인을 알린 선각자 중 한 명이다. 아마도 17세기경부터 이처럼 달콤한 와인이 생산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스위트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소떼른과 바르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소떼른이라는 하나의 원산지 명칭을 쓸 수 있다.
전체적으로 바르삭 와인이 소떼른보다 가벼운 편이다. 그랑 크뤼 분류는 소떼른 와인을 이해하는 좋은 예시지만 훌륭한 와인들이 많이 빠져 있다. 그랑 크뤼에 포함된 끌래망, 뤼섹, 쉬뒤로, 기로 등은 간드러지는 달콤함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랑 크뤼가 아닌 와인 중에는 질레뜨와 레이몽 라퐁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훌륭한 샤또들이 존재하지만 최고에 대한 경쟁은 없다. 최고는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 이름이 바로 샤또 디켐이다.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자 샤또 디켐
보르도 남부의 소떼른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위트 와인이 생산된다. 메독 지역에서는 주로 레드 와인이 생산되는데 비해, 소떼른에서는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 나온다. 샤또 디켐(Ch. d'Yquem)은 소떼른 와인 중에서 유일하게 특 일등급(Premier Cru Superieur)으로 지정되어 있을뿐더러 소떼른의 명성을 좌우하는 디저트 와인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가히 소떼른 와인의 제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우아한 감미(甘味)를 느껴보면 제왕보다는 기품이 넘치는 여왕에 비하는 게 더 어울린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들어찬 단맛이면서도 절제미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을 구축한 빅토리아 여왕과 비교한다면 어울릴 듯하다.
샤또 디켐은 1785년부터 뤼살뤼스(Lur Saluces)가문에서 소유해오고 있다. 얼마 전 샤또 디켐은 소유 지분을 일정 정도 양도하면서 세계적인 명품 기업 프랑스의 고급품 전문회사 루이뷔통 모에 헤네시(LVMH)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소유주가 바뀌었다고 해서 맛이나 품질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와인 생산에 관한 모든 권한은 뤼 살뤼스 가문의 후예인 알렉상드르 드 뤼 살뤼스(Alexandre de Lur Saluces)백작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가문의 명예를 지키듯 이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최고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샤또 디켐의 자존심
샤또 디켐은 달다. 하지만 단순히 달다라는 말이라면 이 와인의 풍미를 떨어뜨리는 표현이 될 덧이다. 이켐의 진정성은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듯한 명확한 절제미에서 나온다. 달콤하면서도 그 맛이 결코 과하지 않게, 가장 고급스러운 단맛을 펼쳐 보인 후 쾌감이 극에 달할 정도로 혀를 자극시켜 놓는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정확한 선에서 단맛의 여운을 자제해 버린다. 달콤함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토해 낸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켐은 작황이 나쁜 해에는 아예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다. 최근에도 1992년 와인이 출시되지 않았고, 20세기 통틀어 9번에 걸쳐 와인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정도로 고급이라면 와인을 만들기만 해도 떼돈을 벌 텐데, 도대체 왜?” 바로 이런 질문에 이켐의 궁극적인 특별함이 숨어있다. 예쁘지 않은 모습은 감추고 싶은 것이다.
여자에 비한다면 이켐은 이미 지극히 아리따운 미인이다.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대중들에게 맨 얼굴을 드러내기는 싫은 것이다. 괜히 나서서 사람들을 실망시키느니, 아니 자기 자신을 실망시키느니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마치 말년의 그레타 가르보 같은 삶이다. 꼭 나서야 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자. 이런 완벽함이 이켐이 추구하는 맛이다.
소떼른의 많은 샤또들은 포도를 일일이 수확할 수 없어 한꺼번에 수확하지만, 샤또 디켐은 여기서도 오랜 전통을 지키고 있다. 전문적인 인력들이 ‘잘 상한’ 포도를 일일이 손으로 따서 압착시킨다. 눈과 경험, 타이밍을 맞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꿀처럼 달콤한 이켐이 나오기까지는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켐의 라벨
라벨을 보라. 맛과 수준에서 얼마나 자신감 넘치는 와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 단순하고 명쾌한 디자인은 언제 봐도 그대로다. 바탕은 노란빛으로 깔려 있고, 나머지 모든 디자인과 표기는 와인을 연상케 하는 황금빛이다. 왕관 하나가 위에 놓여 있고, 그 아래 샤또 디켐, 소유주인 뤼 살뤼스, 그리고 빈티지가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음식과 샤또 디켐
소떼른 와인이 가장 궁함이 잘 맞는 음식은 프와그라다. 통통하게 잘 여문 거위간 프와그라. 그 부드러우면서도, 기름진 맛. 동시에 달콤한 맛이 은은하게 우러나는 프와그라와 샤또 디켐의 결합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식탁이 된다.
보트리티스 씨네레아가 침투한 포도 알은 레드 와인을 만드는 포도에 비해 크기가 겨우 20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포도원에 비하면 생산량도 적을 수밖에 없다. 연간 10만 병 정도의 와인이 생산될 뿐이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겨우 한 잔의 와인이 나오는 양이다.
소떼른에서 생산되는 어떤 와인도 이켐과 비견되지 못한다.
“단지 샤또 디켐이 존재하고, 그 나머지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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