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딸보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지금의 보르도 지방을 두고 치른 100년간에 걸친 전쟁이다. 문제는 1137년 프랑스의 왕이던 루이7세와 프랑스 남서부에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아키텐의 알리에노르가 결혼하면서, 결혼 조건에 이 땅들을 왕실 직영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후에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결별하고(당시 30세) 앙주의 백작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앙리(당시 17세)와 재혼하면서 지참금으로 자기 소유의 땅을 몽땅 가지고 가버리는데, 이 앙리가 2년 후에 영국의 왕, 헨리2세가 된다. 1154년 헨리2세가 왕위를 계승받게 되었을 때, 그는 본래 갖고 있던 앙주 땅과 함께 노르망디, 브르따뉴, 리무쟁, 가스꼬뉴, 아키텐까지 프랑스 왕국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백년 전쟁의 싹이 되었다.
하지만 보르도가 영국에 속했던 이 시기에 보르도 와인은 영국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와인의 명산지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완벽한 기후와 토양조건에 무역항으로서의 보르도 항까지 갖춘 보르도가 와인 재배와 판매에 최적지로서 유럽에 입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백년 전쟁의 끝에서 우리는 잔 다르크와 딸보 장군을 만나게 된다. 백년 전쟁말기,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으로 진군한다. 이교도의 손에서 프랑스를 구해내자며 진군하는 잔 다르크는 비록 적이지만 희생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단신으로 적진에 달려가 이렇게 명령한다.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냥 물러가라.” 이때 이 말을 듣고 고뇌하면서 퇴각했던 영국장군이 바로 톨벗,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면 딸보이다. 그는 까시티옹(Castillon) 전투에 참여해 1453년 7월 17일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는데, 샤또 딸보는 이 영국군 장군 톨벗을 기려서 와인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프랑스의 상징인 와인에, 그것도 백년씩이나 싸운 적장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딸보 장군의 면모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샤또 딸보가 프랑스 와인등급 중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클라쎄에 들어있는 명품 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샤또 딸보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이다. 다른 와인들에 비해, 이 쉬운 이름의 와인은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와인으로,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샤또 딸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다고 할 정도이다. 그 인기 비결은 바로 짧고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상표 이름 때문이다. 보통의 와인 이름은 길기도 길뿐더러 사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직까지는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만 들어도 바로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바로 샤또 딸보였던 것이다. 1970년대, 국내 대기업들이 전 세계로 진출하던 시절, 종합상사 수출 담당 직원들은 전 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비즈니스 접대를 해야 했다. 적당히 아는 척도 하게 해주면서, 고급와인임에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고, 그런대로 마실만하며 무엇보다도 발음하기 쉬운 샤또 딸보는 당시 우리 수출역군들의 비즈니스 식탁에서 훌륭한 역할을 잘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샤또 딸보의 인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히딩크이다. 월드컴 4강의 위업을 달성한 2002년 열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막 16강에 진출했을 때, 그는 “오늘밤은 와인 한잔 마시고 푸욱 쉬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그날 밤 그가 마신 와인이 샤또 딸보 98년산이었다고 한다. 그는 샤또 딸보를 즐겨마셨다고 하는데, 이 와인은 터프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가진 히딩크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샤또 딸보는 보르도의 중추적인 네고시앙(와인 도매상) 중 하나인 꼬르디에(Cordier) 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샤또 딸보는 1855년 그랑 크뤼 분류에서 4등급으로 책정되었다. 국내에서는 너무 흔히 보이는 탓에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오해와 달리 꽤 수준 높은 와인이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지금의 보르도 지방을 두고 치른 100년간에 걸친 전쟁이다. 문제는 1137년 프랑스의 왕이던 루이7세와 프랑스 남서부에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아키텐의 알리에노르가 결혼하면서, 결혼 조건에 이 땅들을 왕실 직영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후에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결별하고(당시 30세) 앙주의 백작이자 노르망디의 공작인 앙리(당시 17세)와 재혼하면서 지참금으로 자기 소유의 땅을 몽땅 가지고 가버리는데, 이 앙리가 2년 후에 영국의 왕, 헨리2세가 된다. 1154년 헨리2세가 왕위를 계승받게 되었을 때, 그는 본래 갖고 있던 앙주 땅과 함께 노르망디, 브르따뉴, 리무쟁, 가스꼬뉴, 아키텐까지 프랑스 왕국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백년 전쟁의 싹이 되었다.
하지만 보르도가 영국에 속했던 이 시기에 보르도 와인은 영국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와인의 명산지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완벽한 기후와 토양조건에 무역항으로서의 보르도 항까지 갖춘 보르도가 와인 재배와 판매에 최적지로서 유럽에 입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백년 전쟁의 끝에서 우리는 잔 다르크와 딸보 장군을 만나게 된다. 백년 전쟁말기,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으로 진군한다. 이교도의 손에서 프랑스를 구해내자며 진군하는 잔 다르크는 비록 적이지만 희생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단신으로 적진에 달려가 이렇게 명령한다.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냥 물러가라.” 이때 이 말을 듣고 고뇌하면서 퇴각했던 영국장군이 바로 톨벗,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면 딸보이다. 그는 까시티옹(Castillon) 전투에 참여해 1453년 7월 17일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는데, 샤또 딸보는 이 영국군 장군 톨벗을 기려서 와인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프랑스의 상징인 와인에, 그것도 백년씩이나 싸운 적장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딸보 장군의 면모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샤또 딸보가 프랑스 와인등급 중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클라쎄에 들어있는 명품 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샤또 딸보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이다. 다른 와인들에 비해, 이 쉬운 이름의 와인은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와인으로,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샤또 딸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다고 할 정도이다. 그 인기 비결은 바로 짧고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상표 이름 때문이다. 보통의 와인 이름은 길기도 길뿐더러 사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직까지는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만 들어도 바로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바로 샤또 딸보였던 것이다. 1970년대, 국내 대기업들이 전 세계로 진출하던 시절, 종합상사 수출 담당 직원들은 전 세계 바이어들을 상대로 비즈니스 접대를 해야 했다. 적당히 아는 척도 하게 해주면서, 고급와인임에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하고, 그런대로 마실만하며 무엇보다도 발음하기 쉬운 샤또 딸보는 당시 우리 수출역군들의 비즈니스 식탁에서 훌륭한 역할을 잘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샤또 딸보의 인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히딩크이다. 월드컴 4강의 위업을 달성한 2002년 열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막 16강에 진출했을 때, 그는 “오늘밤은 와인 한잔 마시고 푸욱 쉬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그날 밤 그가 마신 와인이 샤또 딸보 98년산이었다고 한다. 그는 샤또 딸보를 즐겨마셨다고 하는데, 이 와인은 터프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가진 히딩크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샤또 딸보는 보르도의 중추적인 네고시앙(와인 도매상) 중 하나인 꼬르디에(Cordier) 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샤또 딸보는 1855년 그랑 크뤼 분류에서 4등급으로 책정되었다. 국내에서는 너무 흔히 보이는 탓에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오해와 달리 꽤 수준 높은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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